* 경고 -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 경고 - 이 리뷰는 독단적인 해석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헨리는 분명 이짓거리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겁니다.
...여긴,
그러니까 이 영화가 통째로 주인공 헨리의 「개인 지옥」입니다.
이레이저 헤드 -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이 천연두나 문둥병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흉칙한 남자의 정체는
자신의 지옥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되풀이 한
헨리의 처량한 말로 입니다. (* 5억년 버튼 이야기 참조)
헨리의 내면(혹성)에 갇혀 있는 이 남자는 오직 저 깨진 유리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헨리의 마음의 창이죠.)
실제로 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 래버만이 그가 가진 유일한 선택권(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이 래버를 당기면 헨리의 악몽이 또 다시 시작되는 거죠.
이것은 말 그대로 무간지옥의 스위치입니다.
...아마 평범한 남성이 한 번 사정할 때 배출하는 정자의 수(3억 ~ 5억마리)만큼
그는 이 악몽을 반복해야 할 것 입니다.
망설임 끝에 남자가 레버를 당기자,
헨리의 입에서 정자가 하나 배출됩니다.
(이게 배출한 정자의 갯수 만큼 지옥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첫번째 근거입니다.)
그리고 정자는 한 웅덩이 위로 떨어지고,
이 순간 헨리의 악몽이 시작됩니다.
헨리는 왠지 어리숙해 보입니다.
겉보기에는 여느 보통의 성인 남성이지만,
하는 행동은 어린 아이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커다란 문을 지나
어둡고 음침한 공장 지대에 쌓여있는 자갈 더미를 보더니
일부러 자갈 더미 위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헨리의 모습은
그에게 남아있는 앳되고 순수한 면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려던 참에 헨리는 어떤 웅덩이를 실수로 밟습니다.
이때 헨리는 오른발로 웅덩이를 밟는데,
막상 아파트에 도착해서는 왼발에 신은 양말을 벗어 라디에이터에 말리죠.
이는 헨리가 또 악몽 속에 들어왔지만,
정작 헨리는 자신의 실수를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헨리는 옆집의 매혹적인 여성으로부터
자신이 전 여자친구 메리에게서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걸 전해 듣습니다.
헨리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별 망설임없이 메리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헨리의 선택이
앞으로 닥쳐올 악몽의 발단이 됩니다.
시종일관 불안해 보이는 전 여자친구 메리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메리의 어머니
지나치게 많은 새끼들을 달고 있는 어미개
느닷없이 등장해 자신의 직업과 휴유증 등에 대해 기관총처럼 쏟아붓는 메리의 아버지
그저 부엌에 앉아 있을 뿐 시체처럼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섬뜩한 메리의 할머니
.
.
.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헨리는 물론
헨리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지금의 모든 상황들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반복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자각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메리의 가족 모두가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건 사실 네 놈 때문이야!' 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죠.)
이변은 저녁 식사에서 발생합니다.
메리의 아버지가 헨리에게
'자신은 왼손이 마비가 되서 썰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 닭고기를 대신 썰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를 헨리가 받아들이고 칼과 포크를 들자
어째서인지 닭이 하혈을 하면서
다리를 위 아래로 그로테스크하게 움직입니다.
이건 랙이 발생한 겁니다.
지나치게 반복된 헨리의 악몽으로 인해
일시적인 지연 현상이나 예측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그만 움직이는 닭고기나
메리와 메리 어머니의 발작이란 충격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만 거죠.
하지만 메리의 가족들은 매번 정해진 틀 안에서만
주인공 헨리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헨리가 자신이 악몽을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어머니는 헨리를 불러내더니 뜬금없이
메리와 성관계를 맺은 적 없냐고 다그칩니다.
잘보면 어째서인지 이 장면은 헨리가 궁지에 몰린 게 아니라
메리의 어머니가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입니다.
급기야 메리의 어머니는
헨리에게 성적인 유혹까지 합니다.
마치 [메리와 섹스를 했습니다.]
라는 대답이 아니라
부탁이니까 제발 다른 선택지를 골라줬으면 하는
메리의 어머니 나름대로의 처절한 발버둥 같습니다.
하지만 헨리가 보여주는 행동(선택)은
예전과 딱히 다를 바 없기에
그들 모두를 실망시키고 맙니다.
메리 역시 헨리가 자신과 결혼해줘서
안심하는 모습이 절대 아닙니다.
헨리가 코피를 흘리며
[그럼.] 이라고 대답한 순간
(지금 곤란한 상황만 대충 모면하려고)
메리는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절망한 듯
큰 목소리로 오열합니다.
헨리가 기형적인 아기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남자로써의 책임감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주위의 분위기에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헨리는 기형적인 아기를 수동적으로 떠안습니다.)
타의로 떠안은 이 아기야말로
지금의 헨리가 물리쳐야 할 가장 큰 시련 중에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 기형적인 아기가 헨리의 자식이라는 것이고
크고, 강하고, 포악한 괴물이 아니라,
작고, 여리고, 순수한 악이라는 점입니다.
메리가 홀로 아기를 보살피는 동안
헨리는 우편함에서 왠 말라 비틀어진 지렁이가 들어 있는 소포를 받습니다.
이 지렁이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기억의 전이] 입니다.
[* 실제로 미로를 탈출하는 것을 학습한 지렁이를 말려서 빻은 가루를
다른 지렁이에게 먹이면
그 지렁이는 단 한 번도 미로를 지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로를 지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이를 데이빗 린치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명 이 지렁이가 각성의 촉매 내지는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의 세이브 포인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헨리는 이 지렁이를 자신의 서랍 속에 몰래 숨겨놓습니다.)
헨리가 덩치만 크지 아직 순수하다는 것은
이 뒤에도 여러 번에 걸쳐 드러납니다.
라디에이터를 보면서 망상에 빠지는 것,
육아는 전적으로 메리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심지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아기가 내내 끔찍한 울음소리를 터뜨리지만
헨리는 태평하게 숙면을 취합니다.
이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나
사회성이 결여된 소시오패스라서가 아니라
그저 덩치만 큰 어른이이기 때문입니다.
메리는 헨리의 태평함과
자신의 처지에 분통해 하다
결국 폭발해 버리고,
비바람이 쏟아지는 와중에
아기를 두고 홀로 친정에 돌아가 버립니다.
친정에 돌아가기 전 메리는 헨리로 하여금
육아 노이로제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어떻게든 이해시켜 보려는 듯
침대를 온 힘을 다해 삐걱삐걱 움직이게 하는데
정말이지 너무나도 처량해보입니다.
침대의 창살 부분을 잡고 흔드는 이 모습은
흡사 헨리뿐만 아니라 메리 역시
이 악몽에 갖힌 죄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듯 합니다.
메리가 헨리를 원망하는 것은
오직 헨리만이 이 아득하게 되풀이되는 악몽속에서
유일하게 [망각]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니체 왈 -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망각은 깨달음을 방해하지만
반대로 너무 많은 기억으로 인해 절망하지 않게끔 도와줍니다.
하지만 헨리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위화감을 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죠.
(그래서 헨리는 모두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겁니다.)
메리가 떠나자
헨리는 그제서야 아기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혹시 아픈건가?' 하고 생각하며
아기에게 체온계를 물리자
아기는 마치 혹역 환자처럼
온몸에 울긋불긋한 반점이 생깁니다.
온도계를 대기 전만 해도 멀쩡했던 아기가 말이죠.
이 아기는 헨리의 가장 큰 시련입니다.
헨리에게 죄책감을 주고,
절망시키기 위한 도구죠.
이 아기는 헨리의 자식이란 설정이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는
자신의 자식이 고통받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아기는 교활합니다.
작고, 여리고, 순수한 악인
아기는 필사적으로 헨리의 도움을 갈구합니다.
헨리가 잠시라도 아기로부터 떨어지려 하면
필사적으로 울며 헨리의 죄책감과 양심을 자극합니다.
그 어떤 독보다 치명적이고
그 어떤 공격보다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작중 어디에도
헨리가 이 아기의 진짜 아버지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헨리가 메리와 잤을지도 모른다는 정도의 의심뿐입니다.
확답 역시 메리 가족들로 하여금 억지로 강요받았을 뿐이죠.
헨리의 죄는 그저 납득한 것 뿐입니다.
하나,
둘,
.
.
.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납득해선 안될 것까지 납득하고 만거죠.
아기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헨리는
라디에이터의 소음에 멍하니 귀를 기울입니다.
잠시 후, 헨리의 현실 도피성 망상이 시작됩니다.
라디에이터 안에 불이 켜지고,
무대가 들어서더니,
그 무대 위로 귀여운 라디에이터 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마치 만화 캐릭터처럼
볼살이 다소 과장스럽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속에서
헨리의 유일한 안식은 이 라디에이터 걸 뿐입니다.
라디에이터 걸(줄여서 라걸)은 무대 위에서 박자에 맞춰
좌우로 스탭을 밟으며 움직이는데...
천정에서 정자가 하나 둘씩 떨어집니다.
라걸은 처음엔 정자들을 밟지 않으려 신경쓰지만
그 수가 점차 많아지고 스탭에 방해가 되자
정자를 고의로 밟아 짓이깁니다.
앞에 언급했듯이 이 정자는 헨리가 거쳐야 할 악몽의 횟수입니다.
라걸은 은근슬쩍 두 마리를 밟아 죽이는데,
이는 헨리를 도와준 겁니다.
수억개의 정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적어도 이 악몽을 두 번이라도 덜 반복해도 되는 겁니다.
(우연히도 라걸과 지장보살이 비슷한 면이 많네요.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기 전엔 자신도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과
지장보살의 기원이 원래 소녀인 것까지도)
라걸은 지옥을 순례하는 헨리를 도와준 댓가로
무대에서 일시 퇴장당합니다.
직후,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느닷없이 헨리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서
갑자기 메리가 슥 - 하고 나타나는데...
마치 침대 메트리스 안에서 위로 솟아오르듯이 등장합니다.
헨리는 원래 친정에 가 있을 메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잠결이라 전혀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좁으니 옆으로 비켜달라고만 말합니다.
(이때 메리는 마치 그 자신이 여성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메리의 몸에는 정자들이 파고들고 있었고
이를 깨달은 헨리는 경악하는 와중에도 황급히
정자들을 메리의 몸에서 뽑아내어 벽에 패대기 쳐 버립니다.
헨리가 느끼는 이 충격과 공포,
역겨움에 반응하여
그가 서랍에 숨겨두었던
지렁이가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말라붙은 지렁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흙을 파먹으며 덩치를 조금씩 키우더니
적당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입을 크게 벌립니다.
이 지렁이의 입을 통해 들어간 곳은
헨리의 악몽이 만들어낸 또 다른 분기점입니다.
헨리가 눈을 뜨자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아내는 사라지고 없고,
이웃집의 매혹적인 여성이
헨리에게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되냐고 먼저 말을 겁니다.
쑥맥인 헨리는
적극적인 그녀의 유혹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려드는
시끄러운 아기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둘은 함께 정사를 나누는데
(그 와중에도 아기는 울면서 방해를 하려 듭니다.)
작중 여러 번 등장했던 웅덩이 안에 들어간
둘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갑니다.
이윽고 웅덩이의 물은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는데...
여기서 그녀는 헨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거대한 혹성을 보고 공포에 빠집니다.
이윽고 라걸이 등장해
[천국은 모든 게 좋다]는 노래를 부르고,
헨리로 하여금 무대 위로 올라오게 합니다.
그리고 라걸은 자신의 양 손을 천천히 내미는데
이를 잡자 헨리는 순간적으로 광명에 휩싸입니다.
라걸은 헨리의 희망이자
구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는 헨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처음으로 의문을 품습니다.
이때 헨리는 자신의 말로를 스쳐가듯 목격합니다.
헨리는 이 지옥(악몽)의 영원한 죄인이고
대양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물방울입니다.
그리고 이 지옥은 현실입니다.
헨리는 패닉에 빠집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여태껏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상식이나
가치관이 하루 아침에 붕괴하는 것은 공포입니다.
곧 무대 위로 죽은 나무가 심어진 흙더미가 옮겨져 옵니다.
(이 죽은 나무는 헨리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헨리는 단상 위에 서서 공황 장애에 걸린 것처럼
손잡이를 계속 빙글빙글 돌립니다.
마치 죽음의 공포를 눈 앞에 두고
유아 퇴행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끝없이 챗바퀴처럼 돌리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갑자기 목에서 페니스 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와
헨리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쏙 들어갑니다.
그리고 단상 너머로 떨어진 헨리의 머리통을
누군가가 무대 위로 도로 집어던집니다.
이 장면에 대해선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헨리 자신의 충동적인 욕망, 본능 등이 구현화되어
머리의 이성이 날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번 분기의 헨리의 차례가 끝나
그 견딜 수 없는 기억이 각인되어
자아가 엄청난 진실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헨리의 새로운 머리를
준비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 악몽을 이전에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반복했었고,
앞으로도 거듭 반복하게 되리라는 진실)
헨리의 세계를 상징하는
나무의 뿌리에서 하혈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피는
헨리의 잘려나간 머리를 적시기 시작하는데...
정작 헨리의 잘린 목쪽에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이윽고 헨리의 목 단면에서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헨리의 목 안에서 기형적인 아기의 머리가 솟아 올라옵니다.
이 아기는 새로운 헨리이며
재탄생의 울음을 터뜨리는 겁니다.
태어날 때 아기는 울고
이를 모두가 축복한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헨리가 악몽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축복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무대의 중심에서 새로운 헨리가 울부짖습니다.
(* 기형적인 아기는 헨리의 자식이 아닌
헨리가 마지막까지 집착하는 기형적인 자기애를 상징하는 겁니다.)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악몽에서 튕겨나간 헨리의 머리는
피 웅덩이안으로 가라앉더니
돌연 바깥의 하늘에서 지상으로 툭 - 떨어집니다.
그 직후 대기를 하고 있던
[소니]라는 소년이 나타나더니
헨리의 머리를 주워들고는
못내 아쉬워 하는 늙고 무기력한 노숙자를 뒤로 하고
재빨리 연필 공장에 달려갑니다.
(여기서 지상은 헨리의 머리통이
자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필 공장의 사장은 엔지니어에게 시켜
헨리의 머리에서 뽑아낸
지우개를 연필 끝에 다는데,
이 지우개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연필 공장 사장이 소년에게
헨리의 머리 가격을 치르는 동안
헨리의 지우개 가루가
공중으로 날려집니다.
기억을 하는 장기인 머리가
오류를 지우는 도구로써 팔려진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합니다.
(*망각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이니까요.)
잠에서 깨어난 헨리는 대체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악몽인지 매우 혼란스러워 합니다.
여전히 현실은 암울하고
설상가상으로
기형적인 아기(기형적인 자기애)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뭔가 꿈에서 엄청난 진실을 본 것 같지만
눈을 뜬 순간 헨리는 그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헨리는 멍하니 창 밖을 보다
우연히 두 남성의 난투를 목격하는데,
뒤쫒던 남성이 몽둥이를 들고 무자비하게 다른 남성을 폭행하자
바로 옆에 웅덩이에 선혈이 튑니다.
그 웅덩이는 매우 낯이 익습니다.
(그 웅덩이는 입구이자 출구이며,
헨리의 발이 빠진 장소이며,
생식이 발생하는 곳이고,
세상의 빗물과 진흙, 선혈이 고여
지금 이 순간도 썩어가는 곳입니다.)
「그 웅덩이는 헨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반복해서 다시 저지르는 실수(실패)입니다.」
헨리는 막연한 불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의지할 대상(타인)을 찾습니다.
한 명의 성인 남자처럼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지해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기댈 상대를 갈구합니다.
메리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헨리는 혼자이고
홀로 아기를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내내 울고 보채기만 하던
기형적인 아기가 지금의 헨리가 처한 상황이
웃기기라도 한 것처럼 비웃습니다.
(변하지 않는 자기에의 혐오이자
뒤틀린 자기 비하적 웃음이죠.)
헨리가 다시 문을 열자 이웃집 여성은
만취한 다른 남성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때 헨리는 자기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불안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때 둘이 보여주는 미소가 대놓고 노골적입니다.
그냥 보면 이 장면은 둘의 므흣한 관계를
외로운 헨리에게 과시하는 걸로 비춰지지만
동시에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반복하는 헨리에게
깨달음을 유도하기 위한 연기를 한 것처럼도 보입니다.
특히 이웃집 여성은 변할 줄 모르는
헨리에게 크게 실망했고,
동시에 그의 무책임한 삶을
혐오하고 있습니다.
기형적이기까지한
자기에의 끔찍한 집착은
이 악몽이 처음 시작하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헨리 자신을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아닌
비참한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결국 헨리는 이번에도
자기 해방 - 진정한 구원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이 끝나지 않는 악몽속에서
헨리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힘)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헨리와 마찬가지의 처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실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헨리의 꿈입니다.
헨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펼쳐지는 세계입니다.
헨리가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은
헨리 스스로의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
.
.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옥은 머릿속에 존재한다. 고
헨리는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들더니
기형적인 아기(기형적인 자기애)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잘라 버립니다.
그리고 약간의 주저 끝에
아기의 노출된 장기를 가위로 찔러버립니다.
겉보기에는 헨리가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자해에 가깝습니다.
아기는 경련하면서 피를 울컥 토하더니
죽어가면서 엄청난 양의 배설물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헨리는 이번에도
자신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합니다.
헨리가 헨리 자신이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엔 너무나도 많습니다.
행복했던 순간이나 추억,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
종국에는 자기 자신까지...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죽었어야(극복했어야) 할 기형적인 아기(기형적인 자기애)는
더더욱 크고 거대해집니다.
이어서 방에는 온갖 기괴한 현상들이 발생하고
거대화된 아기의 머리는
점멸을 반복하는 방 안을 미친듯이 날아다닙니다.
별 것 아니라 치부했던
작고, 여리고, 순수한 악이 하나 둘 모여
마침내 헨리로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하고, 포악한 괴물이 되어버린겁니다.
헨리의 자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고 맙니다.
이 컷은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마치 심연을 들여다 본 것 같은 두 눈
하늘 위로 솟구친 머리카락
지상의 오류를 지우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고 흩날리는 지우개 가루들
정기적으로 망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기억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삶의 모순
결국 자기 스스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이제와서 결코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
그 모든 것들이 이 한 컷에 담겨 있습니다.
헨리의 망가진 내면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엔 오작동을 일으키는 래버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헨리의 말로가 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웃고 있습니다.
마침내 헨리는 죽었고,
이 기나긴 악몽도 끝났으니까요.
그러나 횟수로 치면 고작 한 번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몇 번인지 세지말되 오직 기억하는 겁니다.
언젠가 끝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에
헨리의 말로는 이렇게 지옥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겁니다.
라디에이터 걸은 환하게 웃으며 헨리를 맞아 줍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헨리를 기다려 줄 겁니다.
설령 헨리가 이 악몽을 다시 시작할때쯤
모든 것을 망각하더라도 말이죠.
.
.
.
리뷰가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레이져 헤드>를 나름 신나고 재밌게 리뷰하고 싶었는데
...이거 아무리 반복해서 봐도 지옥 루프물이더라구요.
(아... 이 길고 긴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인내심 많은 분들께
정말이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사설 저도 중학생 때 처음으로 이레이저 헤드를 봤을때는
"뭐..뭐야? 이건..."
이라는 감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아무래도 같은 영화를 봐도
어릴 때와는 시점이 달라지더라구요.
나름 국내의 여러 리뷰나 해석을 찾아 봤는데
하나같이 비슷비슷한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신선한 시점으로
영화 <이레이저 헤드>를 분석하고 싶었습니다.
음... 솔직히 말할게요.
좀 쉬운 영화를 리뷰한다고 할 걸 3일동안 만들면서 엄청 후회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리뷰할건데
그땐 어떻게 해야할지... ㅠㅠ
그래서 다음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컬트 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리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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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린냥
컬트 영화 리뷰 블로그가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